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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어른이 싫었던 나는 이제 어른이 된다

나는 늘 어른이 싫었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시켜 웹사이트에 가입하려고 하는데 부모의 동의가 없으면 안된다고 들었을 때부터, 나는 어른이 싫었다. 나는 나 자신이 누군지 알고, 뭘 해야하는지 알았다. 범죄를 예방하는 목적이던 뭐던 나에겐 알바가 아니었다. 생각했다. 부모가 없는 친구들은 어떻게 할까? 이 질문은 아직도 답을 알지 못한다.
인권을 유린하는 교사 아래에서, 성희롱과 폭행을 일삼는 남학생들 사이에서 지옥같았던 1학년, 코로나와 함께한 2, 3학년 중학교 시절이 지나갔다. 내 편은 아무도 없으며 정말 믿을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등학교를 가지 않겠다 결심한 뒤 졸업했다. 이후 가출을 했다. 나는 지금도 외가에서 살고 있다.
나는 어른이 싫었다.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그러나 올해 초, 정말 멋진 어른들을 만났다. 그저 나이만 먹은 법적 성인이 아니라 참된 "어른" 이었다. 집에서 칩거만 하던 나를 끌어내고 나는 조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들이었다. 용기를 입어 처음으로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내가 정신과에 가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성소수자 학교밖청소년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이 20대였고 대학생이었다. 나이 지긋한 정치인들이, 교수가, 흔히 말하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내가 어른을 싫어하게 만들었을 때, 나를 나 자신으로 받아들이게 해주었으며 세상에 얼굴을 내밀 용기를 준 사람들은 나와 가장 가까운 '어리고 버릇없는 놈들' 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공부를 하고싶다는 마음을 먹었다.

검정고시 출신이라면 (그리고 나같은 좌파라면) 상대적으로 쉽다는 논술전형으로 대학에 가볼까 생각했다. 시간당 만 원 수준의 비용이 드는 학원에 다니며, 나는 다시 세상이 싫어졌다. "논술" 이라는 이름을 달고있지만 사실은 그저 문제가 있으면 머리속에 집어넣어 교수가 원하는 답을 뽑아내는 기계를 찾는 전형이었다. 학원에서 선생님이 질문을 하실 때마다 나는 가장 먼저 손을 들어 대답하곤 했다. 중학교때도 있던 습성이었다. 내가 먼저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이건 새로 생긴 용기였다. 문제에 대답을 다 쓰지 못한 상태여도, 틀려도, 웃겨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도 일단 내 생각을 내뱉어 보았다. 아마 나보다 훨씬 많은 학원을 다니고 열심히 공부할 이들은 질문을 들으면 우선 당황하고 몇 분 간 우왕좌왕하기도 했다. 먼저 질문을 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들을 비난하려는게 아니다. 그들은 나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며 아니라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몇 번을 시도해서든 대학교에 갈 것이고 직업을 찾을 것이다. 그게 세상이 정한 옳은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이 싫어진 나는 대학교를 가지 않겠다 선언했다.

이 블로그를 다시 열 일이 없기를 바랬다. 나는 이제 평화롭게 살고싶다고 생각했다. 다른 곳에서 투쟁하는 이들을 응원하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독립을 바라며 집밖으로 뛰쳐나왔던 그때처럼, 또다시 나의 세상은 위기에 처했다. 나의 보호자와 부모는 감히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국민에게 살인을 선언한 그날 한마디 않다가 집회로 귀가가 늦어지고 아파 앓아눕자 그때서야 말을 얹었다. 아직도 여성은 씨발련이며 장애인은 병신이고 노동자는 숫자이며 성소수자는 존재하지 않고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고 비인간동물은 개새끼이다. 윤석열은 기름이다. 이미 타오르고 있던 혁명의 불길이 더욱 커지게 한 기름이다. 윤석열이 간다고 하여도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온전히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날까지.

어른이 싫었던 나는 이제 어른이 된다. 그저 다짐한다. 나는 어릴적의 내가 싫어한 그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아주 평범한 시민 한 명,
여성, 학교밖청소년, 레즈비언, 대학교 비진학자, 정신병자, 가출 경험자, 채식주의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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